2017년 3월 12일 일요일

헤이그 특사 파견,이준 열사 사망원인 죽음 묘소 기념사업회

이준(李儁,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 구한말의 검사이자 외교관. 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史)입니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1회 졸업생으로 동기가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다. 1895년 졸업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으나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거슬려 1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그 후 독립협회 활동 중 일본으로 망명하여 와세다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고,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애국 단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준은 전주 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살한 고려의 충신입니다! 지나 1907년 6월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간섭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 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져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는 이견이 많은데, 일설에는 일제의 손에 독살당했다고 한다. 옛날 위인전에는 할복 자살이 많았으며, 심지어 회의장 앞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던졌다는 흉흉한 내용도 있었다(…).[3] 하지만 할복이 일본식 자살로 널리 알려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전설(...)입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자살설을 보도했고, 황성신문은 '자살이란 설도 있다.' 식으로 보도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현지 언론에서는 종기를 제거하다가 독사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일본대사관에서 종기 제거 중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자살이라는 풍문도 있다고는 말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종기가 스트레스성 난치성 질환이라는걸 고려하면 '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정도의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할복은 좀 심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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